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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주인을 찾는 일에 적극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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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 작성일13-07-02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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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왕릉의 도시라고도 한다.

1천년 이상 왕조가 지속되면서 56대 왕까지 배출한데다 수도를 서라벌에서 옮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경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적도시가 됐고 연간 천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경주를 찾고 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신라 56왕릉 중 그 주인공을 아는 왕릉은 불과 몇기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경주를 찾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불확실하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해가며 거짓말(?)을 해온 것이나 진배없다.

시간이 더 가지전에, 그나마 남아 있는 자료들이 사라지기 전에 무덤의 주인공을 찾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학자들에 따라 주장하는 바가 다르지만 지금까지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진 왕릉은 27대 선덕여왕릉, 29대 무열왕릉과 사망 후 서라벌로 돌아오는 중간에 경기도 연천에 매장된 56대 경순왕 등 3기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30대 문무왕릉, 33대 성덕왕릉, 38대 원성왕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 등 8기라는 주장 등이 제기되고 있을 정도다.

물론 신라왕릉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루어져 왔다. 일제는 금관총, 서봉총, 식니총, 금령총, 호우총, 마총, 쌍쌍총을 발굴했는데 이 중 금관총과 서봉총만 왕릉으로 평가된다.

우리 정부는 1970년대 실시했다.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유물 수습이 주목적이었다. 최대 규모의 황남대총이 목표였지만 경험과 기술이 없었다.

앞서 좀 더 작은 인근 무덤을 먼저 파게 됐는데 곧 천마총이다. 사업은 1973년 4월부터 8월까지 고신라시대 유일한 미술품인 천마도 장니(국보 207호) 등 1만1500여 점의 유물이 수습됐다. 이어 1973년부터 2년여 동안 진행된 황남대총 발굴 사업에서는 금관(국보 191호) 등 무려 5만8천여 점이 쏟아졌다.

최근에도 2009년부터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공동으로 신라왕릉에 대한 실측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 조사는 봉분과 석물, 건물 등 부속 시설물을 포함하는 고분의 주변 배치 및 종단면도 등 도면을 작성하는 등 외관조사에 머물고 있다.

이같이 신라왕릉 주인공에 대한 조사가 지지부진한 사이 일부 학자들은 파격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경주대 고 이근직 교수는 유저에서 오릉(五陵)은 박혁거세 무덤이 아니라 실은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이며 제4대 탈해왕릉·제6대 지마왕릉·제8대 아달라왕릉은 통일신라시대 횡혈식석실분이고, 제13대 미추왕릉은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 제17대 나물왕릉은 7세기 무렵 횡혈식석실분이며 이들은 왕릉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중대(中代) 왕릉 중에서 신문왕릉은 실제 32대 효소왕릉이며, 지금의 효소왕릉은 왕릉이 아닌 성덕왕릉에 딸린 무덤이고, 35대 경덕왕릉은 39대 소성왕릉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주시는 신라왕들의 위폐를 모신 신라종묘전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종묘전도 좋지만 무덤의 주인공을 가리는 일이 우선이고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
경북신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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