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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島 도발은 日 군국주의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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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 작성일15-05-0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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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에 대한 일본의 터무니없는 도발을 경고하는 역사적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경북도와 영남대는 8일 오전 독도정책관실 설치 10주년·영남대 독도연구소 개소 10주년 기념 '광복 후 독도영유권을 둘러싼 쟁점'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뉴질랜드 빅토리아웰링턴대학 알렉산더 부크 교수는 소위 '죽도의 날' 조례제정 경위를 분석한 결과를 '일본의 내셔널리즘에서의 독도와 북방영토의 관련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한다. 부크 교수는 "2005년 시마네현의 소위 '죽도의 날' 조례는 서울보다는 도쿄를 향하고 있었고, 이 조례는 일본 국민들에게 독도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됐으며, 일본 내셔널리즘의 표현이다"라는 사실을 입증하게 된다. 독도 도발의 출발점이 일본의 군국주의적 국수(國粹)정신에서 비롯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외국학자의 시각에서 밝혀낸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남다르다.
 특히 특별강연회에서 독도와 관련된 사료발굴과 연구를 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 박병섭 선생은 "광복 직후 시마네현을 중심으로 일본은 주도면밀하게 독도 침탈 정책을 펼쳐왔지만, 독도의용수비대, 한국 경찰 등이 적극적으로 수호함으로써 일본은 독도 침탈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독도수호를 위한 대한민국 국민의 불굴의 의지를 새삼 강조한 것이다.  
 일본의 독도 침범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자행됐다. 일본은 1953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3차례에 걸쳐 독도에 상륙하여, 일본 영토 표지를 하는 등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1953년 4월 20일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6.25참전 청년들이 중심이 돼 순수 민간 조직인 의용 수비대를 결성, 무단으로 상륙한 일본인을 축출하고 일본 영토 표지를 철거하고, 일본 순시선과 여러 차례 총격전을 벌렸다. 그리고 1953년 8월 5일에는 동도 암벽에 '한국령'이라 새기고 독도 수비의 결의를 새롭게 했다.
 2005년 독도의용수비대를 다룬 김교식의 실화 소설 '아, 독도 수비대'에 따르면 의용수비대는 3~4일씩 예사로 굶는 등 악조건에서 싸워야 했고, 보급선이 오지 않아 빗물을 마시며 살았으며, 1주일을 해초로 연명하기도 했다.
 이렇듯 '아, 독도 수비대'에는 목숨을 담보로 무모하면서도 신념어린 행동으로 독도를 지켜낸 의용수비대의 활약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용수비대의 이런 생활은 1956년 4월8일 울릉 경찰에 수비 임무를 인계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들의 희생적 헌신이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 침탈을 포기토록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선하다. 피 끓는 투쟁정신이 없으면 손바닥 만 한 우리 땅도 지키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학술대회다.
경북신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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