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전쟁 최후 전투 벌인 `인제 한계산성` 사적 지정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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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재 작성일19-07-23 17:35본문
↑↑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된 '인제 한계산성' 남문지 일원. 사진제공=문화재청
[경북신문=장성재기자] 고려 시대 30년 여몽전쟁의 최후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낸 국난극복의 역사적인 현장인 강원도 '인제 한계산성'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23일 지정 예고됐다.
인제 한계산성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설악산 천연보호구역과 국립공원 내에 자리한 유적이다. 한계산(해발고도 1430.4m)을 중심으로 동남쪽과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자연적인 암벽지대를 활용해 부분적으로 성벽을 구축했다.
고려 시대 몽골과의 항전지이자 승전지로서,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1259년(고려 고종 46년) 몽골에 투항한 조휘 일당이 몽골 군사를 끌고 와서 산성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고, 오히려 산성을 지키고 있던 방호별감 안홍민이 야별초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습격해 모두 섬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3세기경 축조된 한계산성은 입지와 양상을 볼 때 시대변화에 따른 성곽 확장과 성벽이 연장된 구조가 잘 나타난다. 성벽과 별도로 축조된 돈후(토축 또는 석축벽을 쌓아서 만든 파수보는 망대) 시설물을 갖추고 있어 몽골 침략에 맞서 사용한 입보산성(들어가서 지키는 산성)임을 알 수 있으며, 평면구조와 축성방식, 부속시설물의 변화양상을 살필 수 있는 대표적인 중세시기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7㎞에 달하며 상성(약 1.7~1.9㎞)과 하성(약 5~6㎞)으로 구분되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에서도 이미 상성과 하성의 존재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상성은 몽골 침입에 대비해 사용하던 곳이며, 하성은 후대에 반(反)원정책 추진을 하면서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상성은 현재 남한 내에서도 매우 험준한 곳에 축조된 산성으로 알려져 13세기 험준한 곳에 주로 형성했던 산성들의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시행한 상성과 하성 시굴조사 결과, 고려~조선 시대의 다양한 유구와 유물을 확인했다. 상성에서는 총 15곳의 구들 건물지,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성벽 기저부를 확인했고, 청자와 도기 조각 등이 나왔다.
하성에서는 총 18곳의 건물지와 ‘至正十八年(지정십팔년)’명(1358년, 공민왕 7년) 기와 조각, 백자조각 등이 나와 한계산성이 13세기 축조된 이래 고려 말에 다시 대대적으로 보수 또는 증축(혹은 개축)되어 조선 시대까지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30일간의 예고를 통해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사적지정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장성재 blowpaper@naver.com
[경북신문=장성재기자] 고려 시대 30년 여몽전쟁의 최후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낸 국난극복의 역사적인 현장인 강원도 '인제 한계산성'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23일 지정 예고됐다.
인제 한계산성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설악산 천연보호구역과 국립공원 내에 자리한 유적이다. 한계산(해발고도 1430.4m)을 중심으로 동남쪽과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자연적인 암벽지대를 활용해 부분적으로 성벽을 구축했다.
고려 시대 몽골과의 항전지이자 승전지로서,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1259년(고려 고종 46년) 몽골에 투항한 조휘 일당이 몽골 군사를 끌고 와서 산성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고, 오히려 산성을 지키고 있던 방호별감 안홍민이 야별초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습격해 모두 섬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3세기경 축조된 한계산성은 입지와 양상을 볼 때 시대변화에 따른 성곽 확장과 성벽이 연장된 구조가 잘 나타난다. 성벽과 별도로 축조된 돈후(토축 또는 석축벽을 쌓아서 만든 파수보는 망대) 시설물을 갖추고 있어 몽골 침략에 맞서 사용한 입보산성(들어가서 지키는 산성)임을 알 수 있으며, 평면구조와 축성방식, 부속시설물의 변화양상을 살필 수 있는 대표적인 중세시기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7㎞에 달하며 상성(약 1.7~1.9㎞)과 하성(약 5~6㎞)으로 구분되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에서도 이미 상성과 하성의 존재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상성은 몽골 침입에 대비해 사용하던 곳이며, 하성은 후대에 반(反)원정책 추진을 하면서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상성은 현재 남한 내에서도 매우 험준한 곳에 축조된 산성으로 알려져 13세기 험준한 곳에 주로 형성했던 산성들의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시행한 상성과 하성 시굴조사 결과, 고려~조선 시대의 다양한 유구와 유물을 확인했다. 상성에서는 총 15곳의 구들 건물지,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성벽 기저부를 확인했고, 청자와 도기 조각 등이 나왔다.
하성에서는 총 18곳의 건물지와 ‘至正十八年(지정십팔년)’명(1358년, 공민왕 7년) 기와 조각, 백자조각 등이 나와 한계산성이 13세기 축조된 이래 고려 말에 다시 대대적으로 보수 또는 증축(혹은 개축)되어 조선 시대까지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30일간의 예고를 통해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사적지정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장성재 blowpa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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